시간은 무섭게도 흘러간다. 가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데, 오늘은 놀랄만큼 차가운 바람속에 아이를 이끌고 등원을 해보니 깨닫고 말았다. 이상기후. 더 이상 미래의 것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예견된 환경오염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쏟아지는 미디어 속에 그럴듯하게 비껴갔고, 결국 오늘날 남은 것은 전염되는 질병과 마스크와 쏟아지는 일회용품들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지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할지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것들만이 떠오른다. 지속가능한 것,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설거지하는데 물을 적게 쓰는 것. 따지고 보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최소화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소비도 없을수록 좋고. 하지만 모든 것들을 다 하려고 하면 불가능하겠거니와 쉽지 않다. ..
잘해내려 애써보려고 했던 내 자신이 다만 안쓰럽기만 했던 시간이 고요하게 흘러갔고, 이제는 눈을 말갛게 뜬 내 모습이 보인다. 거울 위에 있는 모습 말고, 정말 내 모습을 내가 바깥어딘가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마음 그대로의 내 모습을 원했던 것 같은데, 쉽지않은 모습들만 내 안에 가득 있어서 내 곁을 지켰던 외로움들이 다소 허망해지는 나날들이 오면 그때는 정말로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고 속시원히 털어놓고 다 내려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오랜만에 들른 그 곳은 완전히 낯설었어. 지난 8년간 온전히 꿈을 꾼 것만 같게. 나는 그 동네를 정말이지 좋아했는데. 문제없이 나는 잘 되리라 믿고 또 믿었는데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결코 순탄하지도 않더라. 그 나뭇잎들과 그 갈대들과 ..
일상을 설명하자면 참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인 것 같다. 따가운 햇살에 목의 뒷부분이 까맣게 타 버리고 피부에서는 알러지가 일어날만큼 습하거나 뜨거운 날들이 몰아치더니 어느새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스산하다. 차가운 바람과 공기가 느껴진다. 어렸을 땐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서인지 아니면 민감해진 건지 반대로 둔해진 건지 알 수 없지만 입추가 지났음을 올해 처음 몸으로 느꼈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좋아하지만 연락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함을 느낀다. 그 사람들에게 차마 운을 띄우지 못하고 그저 잘 지내는지 마음으로 빌거나 마음으로 안부를 묻는 일들을 하다가 이내 그것마저도 그만두고 만다. 오랜 그리움은 벌써 다가가기 힘든 어떤 것처럼 느껴져서, 누군가에게 다시 그 빈 공백의 시간들을 채워내려..
누구에게나 마음에 담아둔 그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누구이든간에 한때 열렬히 좋아했던 사람이거나 닮고 싶은 사람이었거나 내 마음을 유일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거나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거나 회색의 도시안에서 내 색을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이라든가 하는 그런 그녀. 우리들 마음속에 그런 그녀는 분명히 적어도 꼭 하나는 존재한다. 개인방송을 곧잘 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할때는 그 이야기가 내 관심밖의 것이라도 들으며 즐거웠고 맥주를 마신다든지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 같은 그녀의 일상같은 것도 음악들과 함께 녹아들어 즐거웠다. 우리는 친근감을 곧잘 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소 일방적인. 일방적인 관계맺기에 너무 익숙해져있는 모습이 겁나고 두려웠고 그런 ..
매일 합주가 끝나자마자 혹은 합주시간을 기다리면서 짜장면을 사 먹던 중국집이 있었다. 돈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냥 되는대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던 언젠가의 나. 그리고 내 꼬맹이들. 이젠 꼬맹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버렸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꼬맹이인 꼬맹이들. 합주를 하면서 음악을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고 진심을 전달하는 것인지 알았고, 조금씩 삶에 대한 끈기를 붙잡고 삶을 지속시키는 법을 터득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날들은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소리를 내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날들은 그저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위안을 삼았다. 겨울에 스틱을 들고 합주실을 드나드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오빠들이 없어도 그해 겨울은 살만했다. ..
이를테면, 그렇게 소원해지지도 않고 무뎌지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이불을 털고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리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배식받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매일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마주하곤 하는데, 그런 괴로움들을 도무지 어떤 방식으로들 해결하며 살아가는지 문득 내 처리방식 말고 남의 그것들이 궁금해질 땐,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넷이서 달리면 언제나 4등일만큼 나는 몸을 쓰는 요령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굼뜨기도 한참 굼떴고, 매일 다니던 길도 잃고 한참을 헤매곤 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지, 길을 외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사실 지금 ..
이 블로그를 만든 것, 이 블로그의 제목을 살자라고 지은 것 모두 살아내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마치 사라슈스터처럼 살아내고 싶었다. 엘워드에서 제니가 자기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를 사라 슈스터라고 이름짓고 자신의 현재의 삶을 그대로 녹여낸 소설을 쓴 것처럼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었다. 제니가 온갖 잘못된 행동들을 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소설에 반영하고도 그토록 괴로운 나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결국 자신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글로 풀어내고 그것을 활용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몸부림 아니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 어리석은 짓들을 상기해서 글을 쓰는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나는 내 잘못들을 태연하게 글로 써내려갈 자신이 없다. 많은 드라마에서 작가, 특히 성공한 소설작가들..
내 이기적임에 대해 생각해본다. 2017년 심리상담과 병행했던 정신과 병원에서의 진료 이후로 나는 양가감정을 줄곧 느끼고 있는데, 결국 내가 바닥을 치기까지의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모조리 내탓이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완전히 남의 탓이다 라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어서가 그 이유였던 것 같다. 내 자존감은 누가 툭 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이었는데 최근에 퇴사했던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그 모래성이 무너졌고 갑작스럽게 무너진 모래성을 어떻게든 극복하며 견뎌내기 위해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병원이 우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몸이 아플때 증상을 보고도 몇번을 아니겠지 별거 아니겠지 하며 의사도 아니면서 스스로 진단을 내려버리고 내 몸상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늘상 있는 흔한 일이..